하동군 3.1운동 연표

  • 1918년
    •  제1차 세계대전 종전
  • 1919년
    • 1월18일파리강화회의
    • 2월 8일일본 도쿄 유학생 <2·8독립선언서> 발표
    • 3월 1일서울 등 7개 도시 독립선언서 발표 및 독립만세운동
    • 13일하동읍 장날 정세기와 정성기 등 만세 시위
    • 18일하동읍 장날 오후 3시경 적량면장을 사직한 박치화 하동독립선언서 낭독. 읍민과 상인 독립만세 운동
    • 21일횡천면 여의리에서 문공학, 이재기가 주민을 동원하여 독립만세운동
    • 23일하동읍 장날 정성기, 이경호, 정이백 등 수 백명이 만세 시위
    • 24일옥종면 안계리시장에서 하일로가 연설 후 최인우, 정화영, 권대형 등이 군중(6000명추정)과 함께 앞장서 만세시위하며 경찰주재소로 행진. 대형태극기를 경찰주재소 정문에 세우고 일본경찰의 총을 빼앗아 던지는 등 독립운동 시위. 4명 체포
    • 28일고전면 출신 정재기가 하동읍 장날 만세시위를 계획하였으나 제작한 태극기를 가지고 하동읍 시장으로 가던 중 체포됨
    • 29일청암면 출신 정남시와 권대섭이 궁항리 주민 156명(120명)의 군중과 함께 옥종면 월횡리를 거쳐 안계리 시장까지 행진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 시위
    • 29일진교면 진교리 장날 정재운, 정재백, 이원태, 이홍식 등이 700~800여명의 군중과 진교주재소 앞까지 만세운동.
    • 30일진교면 오후 5시경 700여명의 군중이 진교면 진교주재소 앞에서 전날 체포된 5명 구속자 석방요구 시위. 12명 체포
    • 4월 1일양보면 만세시위 계획이 사전 발각됨
    • 3일북천면 직전리에서 문공학, 이재기 등이 주민 100여명을 규합하여 만세시위하고 일본경찰 주재소 습격. 14명 체포
    • 6일진교면 진교 장날 오후 2시 700여명이 구속자 석방 요구 만세 시위. 군민이 출동한 경찰관과 보병을 포위하고 곤봉, 죽창 등으로 반항하며 보병의 총기를 빼앗았으나 오후 4시 30분 발포 해산됨. 사망자 3명, 부상자 5~6명, 9명 체포
    • 6일화개면 화개장터 장날 승려 김주석을 비롯 정상근, 양봉원 등 학생이 독립만세 시위
    • 6일고전면 주교리장터에서 민족대표 33인을 본떠 일신단을 조직한 박영묵, 이종인, 정상정, 정의용 등이 양보, 진교, 금남면 주민들과 합세하여 600~700여명이 만세 시위. 경찰과 보병 80연대 소속 군인 10여명 파견되어 고전면 성천리 지소마을까지 진입 주모자 색출함. 주민 2~3명 사망, 7명 부상, 군병 2명 부상. 18명 체포
    • 7일하동공립보통학교 학생 박문화, 염삼섭, 정점금, 전석순 등 30여명이 학교에서 하동읍 시장을 향하여 행진하며 독립만세운동. 주모자 2명 체포
    • 7일청암면 평촌리 김기범, 정재옥 등이 마을에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고 다음날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청암면사무소까지 시위행진. 면장에게 만세시위 동참 촉구
    • 11일화개면 이정철, 임만규, 이강율, 이정수 등이 새벽에 ‘광고’벽보를 붙이고, 화개면사무소 담벽에는 면직원 사직 촉구 권고문을 붙임
    • 15일하동군에서 소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경찰과 군인이 해산시킴
    • 16일화개면에서 만세시위가 계획되었으나 사전 발각됨
    • 5월 1일적량면 동산리에서 하동읍내로 통하는 길가 가로수에서 독립만세라고 적힌 종잇조각 수십 매와 미농지 형태의 태극기에 독립만세라고 적힌 것이 첨부된 것이 발견됨. 하동공립보통학교 학생의 일로 내사함
    • 3일하동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풋볼 놀이를 이용해 만세를 외침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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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과 종합민원담당 (☎ 055-880-2076)
최종수정일
2019-02-28 10:2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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