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군 3·1운동 의미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이 제창되었다.
한 민족의 독립문제를 스스로 결정짓게 하자는 이 주장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에 적용되었던 원칙이었으나, 식민지 해방을 간절히 바라는 약소민족에게 희망을 주었고, 우리나라 3.1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으며, 독립만세운동은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하동군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3일 하동읍을 시작으로 횡천면, 옥종면, 진교면, 북천면, 고전면, 청암면, 화개면에서 4월 중순까지 십여 차례에 걸쳐 지속되었다. 주로 장날을 이용해 수백 명에서 천여 명에 이르는 군민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특히, 적량면장이었던 박치화 등 12명이 독립 의지를 담아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만들어 낭독하였다는 점에서 하동의 3.1운동 의미는 더욱 특별하다. 하동군의 각 지역에서는 종이 태극기를 미리 만들어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마을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는 주민과 상인들은 서로 운집하여 일본경찰 주재소로 행진하였으며, 면사무소로 들어가 면장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하도록 촉구하거나, 면직원 사직 권고문을 면사무소 정문에 붙이기도 하였다.

1919년 봄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간 독립만세운동은 남쪽 끝자락 하동에서 수많은 군민들의 강열한 독립 투지로 더욱 뜨겁에 불타올랐다.

3.1운동으로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하동군 출신 독립운동가는 김기범 등을 비롯해 현재 2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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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9-02-27 09: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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