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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고성산성 위령제

고성산성 전투는 하동을 포함해 진주일대 동학농민군이 1894년 10월 14일 옥종면 북방리 고성산성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이다. 동학농민군 약 5,000여명은 고성산성에서 일본군 공격에 맞서 싸웠지만 크게 패하고 지리산으로 퇴각했다. 이 전투로 인한 사망자가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186명, 「오하기문」에는 4백여명, 「백곡지」에는 5,6백여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성산성 전투 후 동학 농민군은 이 지역에서 크게 세력을 잃었지만 지리산을 배경으로 저항을 이어나갔다. 다음해인 1895년 을미의병으로 흡수되기도 했다. 고성산성은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 가운데 경남지역 최대 격전지였으며, 동학군이 반외세운동을 전개한 상징적인 장소로 평가받고 있다. 1995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세워졌고, 해마다 11월 고성산성 전투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고성산성 연구용역 보고서」하동군,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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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11.27.고성산성위령제
  • 1993.11.27.고성산성위령제
  • 1993.11.27.고성산성위령제
  • 1995.03.21.동학혁명100주년기념제막식(옥종)
  • 1995.03.21.동학혁명100주년기념제막식(옥종)
1993.11.23 1,238

1946년 남부지방 순회 중 하동군에 방문한 이승만

1946년 5월 4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이자 민주의원 의장인 이승만이 하동국민학교 교정에서 군민 3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반탁과 자유독립에 대해 연설했다. 이때 찍힌 사진은 이승만이 하동군민과 함께한 순간을 기록한 것이다. 1946년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신탁통치와 임시정부수립 원조를 위해 설치) 결렬, 임시정부 영향력 약화, 남한 단독정부수립 움직임이 있었던 시기로, 이승만은 4월 15일부터 6월 9일까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남부지역을 순회했다. 6월 3일 정읍에서 이승만이 연설한 내용은 당시 남부지방 순회 목적을 보여준다.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할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립하게 되었으니 각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바란다"라고 연설했다.(조선일보194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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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5.4. 남부지방 순회 중 하동군에 방문한 이승만
1946.05.04 154

한청기동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대통령은 같은 해 12월에 전국 20여개 우익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청년단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한청'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국에 걸친 조직을 기반으로 200만 명에 달하는 단원을 모집하고, 사상운동과 향토방위를 위한 군사훈련을 전개했다. 각 읍면에 청년단이 조직되면서 대한청년단은 범국민 우익 청년 단체로 급성장했다. 하동군 대한청년단은 중앙의 전국 조직이 결성되기 전인 여순사건을 계기로 향토방위 목적의 자위대 역할을 했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 당시 사건 가담자들이 섬진강을 넘어 화개면 일대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자, 민간 전투 부대인 '대한청년단 기동대(한청 기동대)'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6.25전쟁이후에는 민간전투부대로서 크고 작은 전투를 주도했다. (「하동향토수호전기」하동군,1987,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디지털하동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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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7.16. 대한청년단 하동군 단원들의 군사훈련 기념(하동국민학교)
  • 1949.9.17. 대한청년단 하동군 적량면 군사 예비훈련생
  • 경찰 대원들과 같이 공공기관을 지키고 있는 한청 기동대원들
  • 군,경찰,청년단원들의 대민 선무 활동광경
  • 적장을 살피고 있는 한청대원
1949.07.16 4,844

화개전투

1950년 7월 25일 6.25전쟁 당시 전남지역 학생 183명이 화개전투에 참가하여 이중 70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화개전투는 국내에서 최초 학도병 중대가 참여한 전투였다. 학도병들은 순천역 인근에서 9일간 무기도 없이 기초훈련만 받은 후에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학도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민간에서 추모제를 진행해오다 이후 군과 보훈처의 지원으로 추모제가 계속되고 있다. 2007년에는 유해발굴작업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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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07.26.학도병추모행사
  • 1997.07.26.학도병추모행사
  • 1997.07.26.학도병추모행사
  • 2002.07.25.6·25전몰의용군추모식
  • 2002.07.25.6·25전몰의용군추모식
1997.07.26 3,645

영신원과 한독의원

1943년경 한센병 환자 4세대가 적량면 동산리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전국에서 찾아온 한센병 음성 환자들이 산을 개간하고 집단마을을 조성하여 영신원을 설립하고 정착했다. 한독의원은 (재)하동 영신원 신창열 초대원장의 도움으로 서독구라협회 지원을 받아 개원했다. 영신마을 주민 뿐아니라 하동지역 사회 의료복지에 큰 공헌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한독의원은 1994년 경영난으로 폐업했다.(참고:디지털하동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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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 한독의원 개업(적량면영신원)
  • 1977.12.30. 영신원 위문품 전달
  • 1978. 한독의원 개업(적량면영신원)
  • 1978. 한독의원 개업(적량면영신원)
  • 1978. 한독의원 개업(적량면영신원)
1977.12.30 1,6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