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리

대도리 대도마을

금남면 대도리 섬마을은 60km 하동군 해안선에 자리잡고 있는 20여개의 섬들 중 사람이 사는 유일한 유인도 이다. 1970년대까지만해도 40여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70여세대가 살고 있다. 대도마을 주민은 대부분이 장수이씨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연혁

멀게는 대도를 "띠섬"이라 불렀으며 가깝게는 "큰섬"이라 불렀다. 행정구역은 옛 곤양군 서면이었으나, 1914년 4월 1일 하동군 남면에 편입되었다가 광복 12년전 1933년에 현 금남면 대도리로 개편 되었다.

마을의 연원과 전설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전 조선조 숙종때(1700년경)로 추정된다. 남해섬에 살고 있던 어느 가난한 장수이씨 부부가 바다에서 조업을 하던중 갑자기 풍랑을 만나 대도섬에 떠밀려 표류가 되었다. 이 부부는 처음으로 대도를 발견하여 이곳에서 터를 닦고 살게 되었는데, 이 섬의 원주민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문헌의 기록조차 찾기어려워 고증하기 어렵고 그저 구비 전설로 남아있을 뿐이다.

계천리

계천리는 사궁, 영천, 계항마을이 있습니다.

사궁마을

마을의 연혁

본 마을은 15세기말 조선 선조때 형성된 촌락으로 추정되며 사궁(射弓)이라는 마을 명칭은 선인들이 지세로 보아 무사가 활을 쏘는 형국이라 하여 射(쏠사)弓(활궁)의 사궁이라는 촌명으로 명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본래 곤양군 서면 지역으로 영천에 속해 있었으며 1914년 4월 1일 하동군 남면으로 개편되었다. 1933년 1월 1일 하동군 금남면으로 개편되었으며 1956년 법정리동을 행정마을로 분리 관할하면서 영천에서 분리하여 사궁행정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지리적 환경

마을의 위치는 금남면의 서부끝자락에 있고 뒤로는 금남의 영봉인 금오산이 굽어보벼 앞으로 흐르는 주교천은 양보면 감당에서 발원하여 30여리 물길을 유유히 흘러 마을앞을 지나 섬진강으로 유입되며 근래에는 남해고속도로 진입로 몇 요금소가 시설되었다

마을관련 전설(도깨비보 전설)

주교천을 막아 사궁들에 물을 대는 사궁보이다. 이보의 맑고 깨끗한 물줄기는 1960년대 금남면의곡창이라고 하는 10만평 사궁 앞들의 논밭에 극심한 한밭에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들녘을 적셔주는 마을 젖줄이다. 이 보의 설치과정과 전설을 소개한다 옛날 마을에서 제일 많이 살고 있는 진씨(陳氏)집안의어느 어른의 꿈속에 눈으로 덮힌 벌판으로 눈이 완전히 녹아있는 검은선이 지금의 보(洑)가 설치된 곳까지 이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이를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진씨 노인은 마을 분들과 상의하여 마침 이곳에 들을 등짐으로 져다가 보를 축조했는데 물길의 구배가 지금의 기계 레벨기로 측정한 것 이상으로 정확했던 것은 물론이고 홍수로 인하여 제방이 붕괴되고 도로가 유실되어도 이 보(洑)만은 조그마한 돌맹이 하나도 빠져 유실되는 일이 없는것을 신통하게 여긴 주민들은 이보를 도깨비보 또는 진도깨비보라고 이름을 붙혀 전해오고 있다. 또한 전설은 인력으로는 아무리 막아도 터지곤 했는데 하룻밤에 도깨비가 이보를 막은 후 부터는 대수가 져도 보가 터지지 않고 농사를 잘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영천마을

마을의 연혁

본래 곤양군 서면지역이었으나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때 계천리로 병합되어 하동군 남면으로 개편되었다. 1933년 1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때에 하동군의 김양면과 남면이 통합 금남면으로 될 때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1956년 법정리동을 행정마을로 분리 관할하면서 영천(永川)행정마을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리적 환경

옛날에는 영천널이라고도 불렀으며 마을 뒤로는 하동과 남해로 가는 국도 19호선 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북으로는 금남면과 고전면의 경계를 이루는 주교천이 섬진강하류까지 영천마을 앞으로 길게 흘러가고 있다. 길게 흐르는 냇가에 형성된 마을이라 영천(永川)이라 명명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곳은 고요한 마을이었으나 시장(재래5일장)이 들어서고 남해 고속도로가 통과하고 광양제철의 산업도로가 개통됨을로써 급격하게 발전한 곳이다.

영천마을 관련 전설(여우바위의 전설)

지금부터 약 205년전 촌락에 사는 어느 한 사람이 만득에 옥동자를 분만했다. 애석하게도 분만한지 2주일만에 배속단으로 인하여 귀여운 아이를 여의어 이 여우 바위밑에 매장을 하였다. 매장한지 1주일후에 아기 무덤을 찾아가 보니 여우가 아기 시신을 도식해 버리고 아기옷만 이리저리 널려져 있어 이것을 본 아버지는 격분하여 여우를 잡아 발발이 찢어 죽일려고 앙심을 품고 그 뒷날 밤중에 장도를 들고 여우 바위골로 살금살금 찾아가 여우가 굴에서 뛰어 나오면 때려 잡을려고 정신을 집중시키는 순간 꾀많은 여우는 죽은 아이 옷을 왈칵 이사람에게 둘러 씌워 호니수상태로 사람이 기절하는 순간을 이용하여 그만 도망쳐 달아났다고 하는 전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오고 있어 이로 인하여 여우 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계항마을

상고시대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 조선조 후기부터 곤양군 서면지역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계항동과 영천동을 병합하여 계항(鷄項)의 계자(鷄字)와 영천(永川)의 천자(川字)를 합쳐 계천리라하여 하동군 남면에 편입되었다가 그 후 1933년에 하동군 금남면 계천리로 개편되었으며 현재 영천 사궁 계항의 3개 행정마을로 구성되었다

계항이란 지명은 특별한 역사적 기록은 없고 지리설에 의해 갖게 된것 같다. 전설에 의하면 영천과 계항마을 뒷산이 닭설로 닭의 목 형국이 되는 지역이라 계항이라 하여, "달구목" "달구미기"라고 부른 것 같다.

진정리

진정리는 금오, 진저으 조금마을이 있습니다.

금오마을

연혁

본래 곤양군 서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남면으로 개칭 남면의 면사무소는 진정 돌다리 동편 100m지점 소재하였으나 1933년 1월 1일 금양면과 남면이 통합되어 하동군 금남면으로 개칭되었다 금오(金午) 옛 호랑개(虎狼漑)는 다음의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호량개는 호 범호자와 랑 땅이름랑으로 호랑개라 하여 호랑이가 갯벌을 건너다가 갯벌에 빠져 죽었다 하여 호랑개이고 둘째, 산의 지형이 호랑이가 누어 있는 형용같다 하여 호랑이고 개는 바다물이 인접하였다 하여 호랑개라 하였다.

지형과 생활환경

지리산 산맥이 굼실굼실 남쪽으로 내달아 우뚝솟은 금오산이 동쪽에 조용히 자리 한곳이 금남의 서편 용등산기숡이 금오마을이라. 한려수도 노량해협을 안대로 하여 터 잡고 살아온 곳, 노량에서 19호국도를 따라 전도쪽으로 4km지점 하동ic 에서 국도 19호선을 따라 노량쪽으로 6km지점 가능골에서 금오마을 도로를 따라 1km지점에 자리한곳, 마을 뒷편 삼전들(전쟁을 세번하였다하여 삼전들)이 폭넓게 펼쳐져 있고 마을 앞에는 한려수도 노량해협이 이어져 선박들이 드나드는 포구였는데 한치 간척공사로 농경지로 변경되어 주민생업이 농업에 전념하는 곳이기도 하다

진정마을

연혁

본래 곤양군 서면의 지역으로 서기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때 금오를 합쳐 진정리가 되어 하동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진목, 진목정, 참나무정이, 차나무징이라고도 불렀음. 진목은 참나무라는 뜻이라 한다. 1933년 1월 1일 금양면과 남면이 통합되어 금남면으로 개편될때에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서면의 면사무소가 이곳에 있었으며 그 후 하동군 남면으로 개편되었어도 남면사무소가 이곳에 있었을 만큼 번창한 마을로 발전 했던 곳이다

지리적 환경

높이 솟은 금오산 줄기 따라 동으로는 병풍처럼 펼쳐있는 남산 남으로는 용등산 줄기따라 용의 꼬리처럼 꿈틀거리듯 길게 어울려 있는 산세가 금오산 맑은물이 석천천을 따라 동에서 서로 흐르고 금오산 뗏방골에서 흐르는 냇물이 북에서 서로 흘러 조금마을 앞에서 합쳐 섬진강으로 흘러 풍수지리설 좌청룡 우백호로 지리적 여건이 살기 좋은 조화를 이루는 마을이라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이면 따뜻한 환경속에 자리잡은 진정마을 역사깊은 진정초등학교가 마을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교육중심의 마을.

유래와 전설

당산(노거수)

남산의 줄기를 따라 마을까지 내려오면 조용히 자리한곳에 기목나무 두 그루가 200년전에 생겨나 마을의 수호신 당산으로 모셔왔는데 해방직후 콜레라(호열자)가 지역에 확산되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때 부락 노인 세분이 같은 꿈을 꾸었는데 예쁜 부인들이 부락에 들어와서 몇일간 쉬어 가겠다고 할때 당산에서 갑자기 신령같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우리 부락에 머물지 못하도록 한다고 지팡이로서 타지역으로 물리쳤는데 그 훗날 그 지역에는 콜레라가 확산하여 많은 인명피해를 보았는데 진정마을에는 피해없이 무사했다하여 그후로 당산에 더욱 관심을 가졌으며 매년 정월달에는 당산제를 정성껏 지내고 있다.

서지골의 유래

남산 줄기 중턱에는 옛 선조들이 서당을 지어 학문을 닦게 했다는 서지골! 지금은 흔적이 없지만 고요한밤 그곳을 지나면 선조들이 독경을 외우는 은은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고 한다.

조금마을

연혁

조금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진목동에 속해 곤양군 서면의 지역에 있다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정리에 속해 하동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1933년 1월 1일 금양면과 남면이 금남면으로 통합 될때 금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56년 법정리동을 행정리동으로 분리관할하면서 조금 행정마을로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유래

조선중기의 시조작가, 자는 약리 호는 고산 시호는 충헌 본관은 해남인 윤선도는 경사백가에 무불통지하고 음양지리에 정통하신 선생이었든바 광해군때 진사에 급제하여 재야 이곳에 계실 때 거대한 황사(黃巳)가 개구리를 잡기 위해 전신에 기를 모우고 있는 형국이라고 일컬었으며 이러한 지기가 주변으로부터 결집됨으로 차후 대인(大人)이 이 고을에 날것이라고 칭했으며 이곳을 조금(助琴)이라고 명하였다하며 조금너리라고도 부리고 있다. 정남의 일출이 온마을 앞뒤 음양을 잘 조화시켜 장수와 부귀가 만당하며 후일 만호의 중심이 되어 금슬(金瑟)의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태평성대와 만석군이 이곳에 모여 들것이라고 하였음.

덕천리

덕천리는 덕포마을 상삼천, 하삼천 마을이 있습니다.

덕포마을

옛날에는 덕개라고 불렀으며 바닷물이 동네 인근까지 들어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진양정씨가 입촌하여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차츰 객지로 떠나 후손들도 많치 않았으며 남해 진정 등지에서 상당수 전입을 하였고 인근의 부대 및 하동화력으리 설립등으로 유동인구가 많이 생겨나 새로운 성씨가 많아졌다. 금남면 사무소까지 6.2km이다. 덕포는 금오산 아래 남향으로 자리잡은 면내에서도 큰마을 큰동네, 시장터 등으로 구분불리어지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작답을 가진자가 별로 없었고 주로 밭농사에 의지하여 보리, 고구마, 감자 등으로 배고픔을 채우다시피하였으나 금남중학교와 금남고등학교가 설립되고 광양제철소와 하동화력 발전소가 건설되면서 학생 및 현장 근로자 등이 많이 유입되면서 수입이 늘어나고 지금은 마늘, 양파 등을 재배 상당한 부톤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옛날에 어느 스님이 이곳(덕천)을 지나면서 이곳에 앞으로 만여명의 인구가 살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금남중.고등학교가 생겨 현재 만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상삼천마을

윗삼내, 큰삼내라고도 부르며 서기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으로 덕천리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행정마을로 되어있다.

마을뒤로 큰 골이 3개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상.하삼천 마을의 유래

상삼천과 하삼천은 삼내라는 이름으로 더욱더 알려져 있다. 마을을 등지고 있는 금오산의 세 골짜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언제부터 삼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자세한 자료가 없어 확인하기 어렵지만 현재의 덕천보다 오래전에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단군시대에는 몰몰이라는 지명에 속해 있었으며 1914년 행정개폐때 덕포의 덕과 삼천의 천을 합하여 덕천리가 되었다 삼내 하면 우선 생각나는 세가지가 있다. 첫째가 문씨집안이고 둘째는 돌이며 셋째는 물이다 삼내는 옛부터 문씨집성촌으로 옛날에는 대부분 문씨들로만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타성들이 많이 들어와 반반정도이다. 하동군사에 따르면 최초의 문씨는 나주 월비리에서 왔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돌은 산골이다보니 자연적으로 많이 있는 모양이다. 토심이 깊지가 못해 경지정리 하기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르고 있어 농사에도 애로사항이 많다. 물은 삼내 최고의 자랑거리다. 냇물을 그냥 먹어도 될정도로 맑고 깨끗해서 지금도 계곡물을 모아서 식수로 사용하고 있으며 풍부한 지하수로 인해 대송 정수장까지 물을 보내고 있다.

대송리

대송리는 대송, 사등, 덕오마을이 있습니다.

대송마을

옛날에는 대송개라고도 불렀으며 마을 뒤 금오산 자락에 위치하여 큰소나무가 많아서 대송(大松)이라 부른 것 같으며 진양정씨 집성촌이었던 곳이나 시대변천에 따라 지금은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마을뒤 북쪽으로는 금오산 자락 숙호등(宿虎登)이 있으며 이 등은 호랑이가 잠자는 형태같은 산이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마을 동쪽으로는 퇴봉이 솟아 있고 앞 남쪽으로는 대송들판이 형성되어 있다.

사등마을

본래 곤양군 서면으로서 서기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송리에 편입되어 하동군 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33년 1월1일 하동군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1956년 법정리동을 행정리동으로 분리 관할하면서 대송리에서 사등(砂登) 행정마을로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송천아래 "손목"밑에 위치하여 대송천의 모래가 많이 쌓여서 사등이라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약 200년 전에 충주지시(忠州池氏)가 남해군에서 건너와 이곳에 정착하여 현재 7대째 거주하고 있으며 그 다음은 김해김씨가 정착하였다. 후대에 들어서 김씨, 이씨, 공씨, 정씨, 박씨, 손씨,조씨,백씨,임씨,추씨, 강씨, 진씨(陳氏)등이 이주해와서 마을 주민 전부가 각성바지이다.

농촌이면서도 부유한 마을이라 도부(到付)장사꾼이 마을에 들어오면 물건을 전부팔고 나갔다고 하여 사랑채 있는 집이 많아서 개나리 봇짐 객이 많이 들어와서 2,3일 숙식하고 떠났다고 한다. 농사짓기 좋은 들판이라서 인근 9개 마을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덕오마을

연혁

먼 옛날부터 해안지역에 형성된 한적한 어촌으로 곤양군 서면지역이었다. 1914년 4월 1일 왜정시대의 행정구역 1차 통폐합때 대소리에 병합되어 하동군 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33년 1월 1일 2차 통폐합으로 김양면과 남면이 금남면으로 개편도리 때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지리적환경

대송 본 마을에서 서북방향 도로를 따라 약 1km를 가면 군부대 정문이 나타나는데 여기를 가는골(細谷)정상이라하고 이곳에서 바다를 향하여 쭉뻗어 내려간 산능선 끝자락에 35호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어촌이다 조개를 비롯하여 해산물이 풍부했던 어촌이라 생계를 바다에 의존했고 아녀자들이 이를 팔기위해 해산물을 머리에 이고 험준한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 한다.

마을의 변천

서기 1964년도부터 환치 뚝을 착공하여 서기 1985년도에 완공하여 60ha의 간척지가 조성되고 서기 1992년도부터 마을 전면 금성면 가덕리(미나문이)에 하동화력발전소가 처음 입주하여 온 마을은 산업기지 영향권에 들었다. 현재 하동군 생활폐기물 매립장이 여기에 있다 ( 2011년 환치에서 덕오로 마을 이름을 변경하였음)

송문리

송문리에는 미법, 수문, 소송, 신기마을이 있습니다.

미법마을

연혁

본래 곤양군 서면지역으로 메너리라고 하였는데 일제강점하 1914년 제1차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미법(彌法) 소송, 수문을 통합하여 송문리가 되어 하동군 남면으로 개편되었으며 1933년 1월1일 제2차 행정구역 통폐합시 금양면과 통합되어 금남면이 되었으므로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1956년 법정리동을 행정리동으로 분리 관할하면서 미법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리적 환경

북쪽에서 웅대한 금오산이 남쪽으로 뻗은 능룡을 따라 웅비한 소금오산이 또 용맥을 이어 웅력을 실고 용감하게 뒤로 우둑서 머무는 연대산 그 웅기의 자세가 좌청룡으로 동편 노량리와 접하여 경계를 이루고 있다. 우백호는 서북방쪽의 소송마을과 경계로 하여 힘차게 감돌아 해변 끝까지 형성되어 있다. 또 연대산 중능은 그 장엄한 기운을 내려 야지를 펼쳐 온당한 세거마을 터전을 만들어 주었고 남쪽에는 한려수도 남해바다가 대호수처럼 반겨주고 있는 경관이 수려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금남면 사무소, 금남면 보건소, 노량초등학교가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수문마을

마을의 연혁

조선시대부터 수문동(水門洞)으로 곤양군 서면에 속해 있다가 일제시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송문리에 통합되어 하동군 남면으로 개편되었다. 이 때 소송의 송자와 수문의 문자를 합쳐서 송문리라 하였다 한다.

지형과 생활환경

수문 마을은 금남면사무소에서 서편으로 2km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노량에서 국도 19호선을 따라 하동쪽으로 1km지점에 지점에서 수문마을 도로를 따라 1km지역에 자리한 마을로 뒤로는 금오산 줄기따라 연대봉이 우뚝 서 있고 삼면이 산으로 병풍처럼 두루고 앞으로는 한려수도 청정해역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이 아름다운 그림과 같이 오고가는 선박들의 분주한 모습들이 인생의 삶으로 한 장면이다. 마을앞은 바다와 접해 있고 하동화력 발전소가 바로 보인다.

마을의 유래

수문 마을은 개가 호랑이한테 공격을 받아 숨은곳(개)이라고 하여 수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라고 하고 또 지형상 산으로 가리어 숨어 있는 마을 같다 하여 수문동리라 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또하나는 옛날에는 배(선박)을 타고 이 마을을 출입하였음으로 바다쪽이 마을의 문이라 하여 물(바다)이 마을의 문이라 하여 수문(水門)이라 하였다는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신기마을

옛부터 송문리에 속해 형성된 마을로 반어촌이었고 평야지 없이 좁은 계곡 사이에 별다른 명지(名地)도 아니고 사찰이나 서실도 없었던 마을이다 본래 곤양군 서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의 폐합으로 미법 소송 수문마을을 합해서 송문리가 디어 하동군 남면으로 편입되었다가 서기 1933년 1.1금양면과 남면이 통합되어 금남면으로 되어왔다. 그 후 신기(新基)마을이 1961년 3.20일에 소송에서 분리되어 현재 신기마을이라 불려지고 있다. 일면 새로생긴 마을이라 샛터라고도 한다. 본래는 터설이에 소송마을 이전에 이미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가 샛터로 올겨 간것이라는 설도 있다.

노량리

노량리는 구노량, 신노량 마을이 있습니다.

구노량마을

섬진강 하구에서 동으로 약30리 지점이며 대가야시대부터 어선의 기항지였으며 문모라섬(남해도)으로 들어가는 도선장이었으며 일본과 교역한 최대의 무역항이고 국제항이었다는 것이 옛 문헌기록에 남아있다. 남해섬에서 강원도 원주까지 연결되는 19번 국도를 돛배가 도선으로 연결시켜 통하다가 그 후 기관선인 금남호(약30톤)로 연결시켜 오다가 남해대교개설로 도선은 없어졌다. 그리고 전남 광양에서 부산으로 운항하는 화물선(팔중호, 복중호)으로 하동에서 생산되는 농수산물과 임산물을 부산으로 부산에서 생산되는 공산품을 5일마다 하동으로 운송하는 중간기항지이며 하동의 해상교통 관문이었으나 남해대교 개통으로 항구의 역할이 쇠퇴하였다.

왜구의 침략이 극심했던 고려때부터 임진왜란 등에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던 지역이며 조선시대에 만호영을 설치하여 왜적을 지켰고 도서관리인 구당관을 배치하였으며 지방에 출장하는 관원들의 숙박소 겪인 노량원을 두었으며 대치리 창몰에 있는 조창을 구노량에 옮겨 상하창의 2개 창고인 노량창이 있었다.

일제 강점하인 1910년부터 1949녀까지 이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던 노량경찰과 파출소(주재소)가 있었던 곳으로 주재소 몬당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선인들의 구전에 의하면 길씨가 이곳에 처음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는 길씨가 한분도 없다.

예날 어느 선인이 지명을 명명하면서 노량이라는 노(露)는 이슬이라는 뜻으로 해만 뜨면 사라짐으로 훗날 물이 귀할것이고 량(梁)은 들보량, 다리량으로 훗날 남해섬과 이곳을 연결하는 다리(남해대교)가 놓일 것이라고 예견했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노량마을

연혁

본래 곤양군 김양지역이었으나 현재 도로 아래는 바다였으며 미미한 해안이었다. 일제강점하 1914년 4월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노량리에 병합되어 하동군 김양면에 편입되었다. 1933녀 1월 1일 김양면과 남면이 통합 금남면으로 됨에 따라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수로의 발달로 하동의 관문이되고 번창하여 취락이 형성되어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신노량이라 하였다. 그때부터 금남면의 행정상 중심지가 되었으며 1956년 법정리동을 행정리동으로 분리 관할하면서 신노량 행정마을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리적 환경

북으로 금오산과 연대봉 남으로는 한려수도와 남해섬 동으로는 남해대교와 광진바다 서쪽에는 미법과 경계하고 있는 해안지역이며 앞바다느 ㄴ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의 해전 격전지이며 전사한 곳이다.

대치리

대치리 대치마을

대치리는 옛 한다사군의 성량현 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이고 모든 것이 이곳을 중심으로 발전한 흔적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마을의 정확한 유래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수 없으나 단군시대부터 마을이 이미 형성되어 있어 군사상에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본래 곤양군 김양면 지역이었다가 일제강점하인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때에 창촌을 합쳐서 대치리가 되어 하동군 금양면으로 개편되었다. 1933년 1월 1일 금양면과 남면이 합쳐서 금남면으로 될 때에 금남면에 편입되었다가. 김양면 사무소가 지금의 마을회관 자리에 있었으며 금남면으로 개편된 1933년에 남면과 합쳐서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동명은 금오산의 큰재가 있어 이것이 곧 대치리가 된 유래인 것 같다. 그러므로 대치는 한재(큰재)로 통칭되고 인근 일원에서는 대치보다 한재로 더 잘알려져 있다.

대치가 이 지역발전에 큰 중심지역이란 사실은 이곳에 창고와 현창이 있음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 현창은 현재 대치리에 창말에 있었으나 뒤에 구노량으로 이건 이름도 노량창으로 바뀌었다. 마을은 본동과 창말 진곶이 솔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동은 앞터, 뒷터, 대숲밑으로 세분해 부르기도 한다. 대숱밑은 대나무가 많았던 곳이라 붙여진 지명이고 창말은 창고가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특징

대치리는 진양정씨의 집성촌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많을때는 마을 주민의 대부분이 정씨들이었다. 서부 경남에선 대치에 사는 정씨라면 한재정씨냐고 되물을 정도로 수거으로나 셋적으로 칭송받는 가문으로 꼽혔다. 그러므로 대치리의 전근대사는 이곳 정씨(鄭氏)들의 역사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정씨들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약400년전이다. 오봉공(鰲蜂公)께서 이곳에 입향한 것이 시초이며 그 후손들은 가문의 번창과 함께 많은 충의열사 및 효자 유행이 줄을 이어 배출되었다는 것이 마을의 특징이라 하겠다.

중평리

중평리는 중평마을과 상촌마을이 있습니다.

중평마을

중평(仲坪)의 지명유래

마을 앞 돌섬 소댕이를 중평이라 불렀는데 그 이름이 전래 되어 중평마을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는 기록이 있다.

원래 이 마을은 중태라 불렀다. 하늘에 삼태(三台) 즉 세별이 있는데, 선조대왕께서 조정의 삼공을 삼태에 비유하였다 충의공 정기룡 장군의 작위가 보국숭록대부로서 삼공의 우의정에 해당하여 고으이 출생지가 당상곡이므로 마을 이름도 중태라 명명하였다고 전래되고 있는데 지금도 이 마을에서 태생하신 80대 노인들에게 고향이 중태라고 하면 이해가 가나 중평이라 하면 잘 납득이 안가는 것을 볼때 가히 짐작이 간다. 또한 충의공 정기룡장군의 매헌실기에 곤양군 중태라 표기되어 있고, 하동군지에도 중태로 표기되어 있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상촌마을.

마을의 본원(연혁)

역사의 기록도 없이 세월에 묻혀 언제 어떻게 마을이 형성되었는지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해안을 낀 산골의 전형적인 농어촌으로 형성된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부터 곤양군 금양면 중평리에 병합되어 있다가 1914년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하동군 금양면 중평리 중상동(仲上洞)이 되었으며 1933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상촌동이 되었다. 1956년 법정리동을 행정리동으로 분리 관할하면서 상촌마을로 이름하고 1개 행정마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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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2-10-31 09:3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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