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점리(개치, 미동, 미서마을)

미점리(개치, 미동, 미서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118세대/256명
  • 마을의 유래
    • 악양은 청동기 시대인 BC 5000년경 이미 촌락이 형성되었고, 섬진강변의 중요한 목이었던 미점도 이 시 기에 성립된 것이다. 국가가 형성된 변한시대 인 BC 108년엔 미점은 대외 연락의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신라때는 범포(帆浦)로 섬진강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군사상 중요한 요지가 되어 관방(關防)으로도 큰 몫을 차지하기도 했다. 조선후기 사창(司倉)이 있었고, 유명한 범포시장(帆浦市場)은 신라때부터 이름났던 곳이다.
    • 1914년 덕양면(현, 하동읍)에서 개치가 악양으로 편입되어 현재 미점리는 개치, 미동, 미서 로 구성되어 있다.
    • 미점리는 악양의 소상팔경 중에 원포귀범(遠浦歸帆)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악양루(岳陽樓)는 개치마을 입구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창건연대는 알수 없으나 원래 미점리 뒷산인 아미산 아래에 있었는데 루는 없어져 터만 남아 있으며, 1936년 지방 인사들이 중건을 시작하여 다음해 옛터에 악양루가 준공되었다. 그러나 영구보존의 적지가 되지 못한다는 여론에 따라 1947년 루지의 밑인 도로가로 옮겼으나, 인가가 멀고 루(樓)의 관리가 어려워 훼손이 잦아 1969년 지방인사들이 고적(古蹟)보호를 위해 현 위치에 건립하였다.
    • 미동마을의 중심에 있는 팽나무는 수령 4백여년, 둘레 6m, 높이 50m로 이 나무아래에는 칠원윤씨(漆原 尹氏)의 중시조(中始祖)가 임진란을 피해 이 곳에 왔다하여 가좌암(可坐?) 이란 한자가 세겨져 있다.
    • 미점리 옆 국도 19호선 섬진강변에는 관광객이 쉬어갈 수 있는 완벽한 편의 시설이 설치되어 있으며, 하얀 백사장과 각양각색의 장승을 볼 수 있는 평사리 공원이 있으며 - 매년 11월초에 악양면 특산물인 대봉감 홍보를 위한 대봉감축제가 개최된다.
    • 마을뒤에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조성되어 있는 구제봉이 있다.

축지리(대축,소축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123세대/255명
  • 마을의 유래
    • 변한시대 낙노국 이었던 이곳은 그 연원이 오랜 마을이다.
    • 본래 진주목 악양현의 지역으로 둔위(屯衛)라 하였는데, 향교가 있었고, 1633년엔 축촌(丑村)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숙종28년(1702년)에 하동권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축지리(丑 只里)가 되었다.
    • 축지리는 대축[大丑(큰 둔이)], 소축[小丑(작은 둔이)]으로 구성되어 있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대축마을에는 천연거암(天然巨岩)을 뚫고 자란 소나무가 뒷산인 아미산(峨嵋山)에 있다. 이 나무는 일명 문암송(文岩松)이라고 하는데 큰 바위를 둘로 갈라 놓으면서 우뚝 솟아오른 모양이 기이하기도 하려니와 남성미를 연상케 한다. 나무높이 12.6m, 둘레 3.2m이며 수령은 600여년으로 보고 있다,
    • 축지리는 대봉감의 시배지로 유명하며 그 맛이 뛰어나다
  • 축지대봉감마을 바로가기

신대리(하신대,상신대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128세대/291명
  • 마을의 유래
    • 상고시대 변한의 낙노국 영토였던 신대리는 그 유서만큼의 사적이나 전설이 남아있지는 않다. 추측하건데 악양의 중심지대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 진다.
    • 서기 1633년엔 예촌동(禮村洞)으로 불린 이 곳은 상신대 쪽의 이야기가 같고, 하신대는 마을형성이 늦게 되었다.
    • 본래 진주목 악양현의 지역으로서 새로 터를 잡았으므로 새터 또는 신대라하였는데 , 숙종28년(1702)에 하동군에 편입되고,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신대, 신중을 합해 신대리 라고 했으며, 현재는 하신대<비까리>, 상신대<새몰>로 구성되어 있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상신대마을의 교석정에는 수령 400여년으로 추정되는 팽나무가 있는데 2주간으로 뻗어 있는 나뭇가지 중 1주간은 바로 서 있고, 1주간은 수평에 가깝게 누워 있으며, 그 사 이에는 아주 단단한 자연석의 할머니 형상을 하고 있다.

신성리(덕계,성두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163세대/342명
  • 마을의 유래
    • 변한시대에 일찍 국가 형태를 갖춘 악양에서 훨씬 후대인 조선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 이는 1633년 성두동(城頭洞)이란 마을 이름으로 기록된 것을 보아도 늦게 형성된 마을이라 여겨진다.
    • 본래 진주목 악양현의 지역으로서 숙종28년(1702년)에 하동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신덕 과 성두를 합쳐 신성리가 되고, 지금은 성두와 덕계(덱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성두마을에는 악양면 게이트볼장과 궁도장인 용산정이 있어 생활체육의 산실이 되고 있다.

신흥리(하신흥, 상신흥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106세대/222명
  • 마을의 유래
    • 변한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오랜 연륜을 가진 마을은 아니고 , 악양의 오래된 마을 보다 늦게 형성된 마을이라볼 수 있다. 이곳은 군사상 요지로 발전했긴 때문에 땅번지란 이름을 지니고 있다.
    • 봉수제는 가야시대부터 시작했지만, 국가에서 정식으로 실시한 것은 조선 세종때(1419~1450년)이므로 이 마을의 성립연대는 조선 세종때로 보여지며, 그렇게 때문에 새마을이란 이름의 신흥리가 된 것이라 여겨진다.
    • 신흥리는 본래 진주목 악양현의 지역으로서 새로 터를 이루었으므로 신흥이라 하였는데 숙종28 (1702연)에 하동군에 편입되었고,
    • 1914年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흥동, 하흥동을 병합하여 신흥리가 되고 현재는 하신흥(아래 땅번지), 상신흥(위 땅번지)로 구성 되어 있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하신흥마을에는 악양중학교가 있다.

중대리(하중대,상중대마을)

중대리(하중대,상중대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111세대/195명
  • 마을의 유래
    • 변한시대 낙노국의 영토였고, 악양현의 한 마을이었던 중대리는 오랜역사를 지닌 산촌이다. 그렇기 때문 에 역사의 조명을 받지 못한 곳이고, 외딴 마을 이었기에 적은 흔적의 역사 밖에 없다.
    • 1633연엔 대속이란 마을이었고, 그 골짜기가 그대로 동명(洞名)이 된듯하다.
    •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옛 맥수를 합쳐 중대리가 되었고, 현재는 상중대(上中大), 하중대(下中大)로 구 성되어 있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상중대마을의 농로를 거쳐 청암면 논골로 갈 수 있으며, 이 곳을 지나는 계곡은 여름철 피서지로 적격이다.

동매리(동매,평촌마을)

동매리(동매,평촌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108세대/212명
  • 마을의 유래
    • 東國雪中梅之形局이라 해서 東자와 梅자를 따서 지어진 리명이다.
    • 마을의 형성연대는 3백년에서 4백년으로 보는 촌로(村老)의 말씀을 그대로 믿을 수 밖에 없지만, 역시 마 을이 이루어지기는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 본래 진주목 악양현의 지역으로서 외딴 산이 있으므로 독산 또는 동매라 하였는데, 숙종 28연(1702년)에 하동군에 편입되고,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동매(東梅)와 평촌(坪村)을 합해 동매리가 되어 지금까지 이루어져 오고 있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만수대(萬壽臺)는 동매리 안산(案山)으로 10여척이나 되는 암벽을 깍아 세운 듯이 서 있는 주위에 효자인 합천이씨, 의성김씨 5형제와 이일만의 시혜기념 (施惠紀念)의 제각이 있다. 그리고 암벽위에는 둘레 3.7m,수음직경 40m나 되는 상수리 나무가 암벽에 뿌리박고 있으며, 소나무와 어우러진 동산이 앞 냇가 대백석(大白石)과 더불어 운치가 있다.

등촌리(덕기,중기마을)

등촌리(덕기,중기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93세대/175명
  • 마을의 유래
    • 변한시대 낙노국일 때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주목을 받던 촌락이다.
    • 특히 악양현일 때 주민의 쟁송을 해결하던 곳이며, 1633년에 당지촌 혹은 삼가식이라 부르던 곳이다.
    •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옛 덕산 기증봉, 청학을 합해 등촌리가 되었고
    • 현재는 덕기(德基), 중기(中基)로 구성되어 있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삼아식현(三阿息峴)이라는 유명한 재가 있는데, 남명 조식선생이 이재를 넘을 때 한 걸음에 세 번의 숨을 내쉬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매계리(매계,노전마을)

매계리(매계,노전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148세대/290명
  • 마을의 유래
    • 상고시대에는 산촌이었던 매계는 산이 빼어나고 물이 좋아 예로부터 이상향이라 불리운 청학동(靑鶴洞 )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 원래 매(?)골이었다 하는데 매의 음을 일본인이 따서 그대로 매(梅)로 표현했다는 말과 청학동 전설을 가 진 곳이기에 매화(梅花)꽃잎이 흐르는 계곡이란 말이 있으나 매(?)골이라고도 하고 옛날에 사동(沙洞) 혹은 다사동(多沙洞)이라고 했다
    • 본래 진주목 악양현의 지역으로서 매국대 밑에 시내가 흐르므로 매계라 하였는데,
    • 숙종 28년(1702년)에 하동군에 편입되고,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노전(蘆田),중산동(中山洞)을 합해 매계리가 되고 현재는 매계, 노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매계곡은 뛰어난 경치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백석탄(白石灘)은 노전마을 앞에 있는 큰 바위에 새겨져 있고, 수석이 청절하다.
    • 또한, 형제봉 등산로가 노전마을을 지나 청학사를 거쳐 산행할 수 있도록 잘 정비되어 있다.

정동리(부계,정동마을)

정동리(부계,정동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121세대/258명
  • 마을의 유래
    • 청동기시대부터 집단 주거지로 성숙한 정동은, 우리 하동에서 가장 오랜된 마을 중 하나다.
    • 섬등 정자(亭子) 숲을 중심으로 그 동쪽이기에 정동마을이며, 서쪽은 정서 마을이다.
    • 낙노국의 중심마을 중의 하나인 이곳은 선진 문물이 받아들여졌고, 일찍 발달된 문화를 소유했다고 볼 수 있다.
    • 숙종28년(1702년)에 하동군에 편입되고 -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옛 정동, 부계(오리내)를 합해 정동리 (亭東里)가 되고, 현재는 부계,정동으로 구성된 큰 마을이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정동마을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숲인 취간림이 있는데, 면소재지에 근접된 곳에 있고 악양천과 인접하여 있어 여름 피서지로 각광(脚光)받고 있는 곳이다 취간정 내에는 팔경루(八景樓)가 있다.
    • 취간정은 선비 이승한(李承漢)이 선인 송남공(松南公)의 뜻을 이어서 창건하였던 정자였는데 없어지고 그 자리에 팔경루가 세워졌다. 경루는 재일교포인 향인 홍갑동씨가 1993년에 귀향하여 향人들의 뜻을 모아 팔경루를 지어 면민에게 헌납한 누각이다.

정서리(상신,정서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264세대/536명
  • 마을의 유래
    • 악양의 중심지이며, 우리고장 하동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된 마을이다.
    • 금석병용시대엔(BC5000연)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고, 삼한시대인 변한때 악양을 중심으로 일어난 낙노국 의 심장이었던 곳이다.
    • 그렇게 그 연원이 오랜 정서는 1633년 상촌. 성지촌 혹은 성후촌이란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원정서(原亭西),상신(上新),주암(周庵),성덕(城德)을 합해 정서리가 되고, 현재 는 상신(새터말),정서로 구성되어 있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정서마을에는 면사무소, 초등학교, 농협, 우체국, 새마을금고 등 행정기관이 있으며,
    • 지리산 남부능선의 끝자락에 우뚝솟은 해발 1,115m의 형제봉은 등산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 또한 형제봉에는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조성되어 있다.

입석리(입석,하덕마을)

입석리(입석,하덕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155세대/302명
  • 마을의 유래
    • 이 곳은 선돌(立石)이 있어 그것이 마을 이름으로 굳어진 지역이다. 선돌(立石)은 거석기념물의 하나이며 , 가공하지 않고 길고 큰 돌을 수직으로세워 놓은 신석기시대의 유물이다.
    • 이를 근거로 입석리는 우리 고장 하동에서 신석기시대에 형성된 마을로 여겨지며 가장 오래된 곳이 아닌 가 여겨진다
    • 숙종 28년(1702년)에 하동군에 편입되고,
    •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화개면이었던 하덕(下德)을 합해 입석리가 되고 현재는 입석(立石),하덕(下德 )으로 구성되어 있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사지(寺址)로 남상원사지가 마을 뒷산에 있는데 미륵불이 있었다고 한다

봉대리(봉대,대촌,하평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144세대/287명
  • 마을의 유래
    • 상고시대인 금석병용(金石倂用)시대에 성립된 마을로 추측되며, 오랜 연원을 가진 곳이다.
    • 악양팔경 (岳陽八景)의 여운으로 옛 중국의 금릉 봉황대의 봉황대에서 유래된 마을이름은 황자를 빼어버리고 봉대(鳳臺)로 되었다고 한다.
    • 본래 진주목 화개현의 지역으로서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서 중국의 소상팔경(瀟湘 八景)과 같다 하여 <봉 황대>라 하였는데,
    • 숙종 28년(1702년)에 하동군에 편입되고,
    •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원봉대(元鳳坮)와 옛 화개 땅이었던 대촌, 하평을 합해 봉대리가 되어 현재는 봉 대, 대촌, 하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봉대마을 남쪽산에 봉황대가 있으며, 중국의 금릉 봉황대를 본따 만들었다 전한다

평사리(상평,외둔마을)

평사리(상평,외둔마을)

  • 가구수 및 인구수 : 112세대/202명
  • 마을의 유래
    • 평사는 변한시대에도 악양의 대외 창구였고, 마을 형성의 깃점이 된 곳이라 할 수 있다.
    • 섬진강을 통한 교통의 발달이 포구(浦口)로서 역할이었다면 신라때나 가야 시대에 성립되고 번성된 역촌 (驛村)은 육로의 교통이 활발하게 만들어 외래 문화의 수용이나 교역에 있어 중요한 목이었던 만큼 변한시대의 이 땅에 낙노국이 유지되는 활력소였다고 여겨진다.
    • 경관이 뛰어나고 잦은 내왕은 비옥한 토지와 함께 큰 마을을 형성했다. 또 이 곳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土 地>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 본래 진주목 화개현의 지역으로서 악양 소상팔경(岳陽 瀟湘八景)의 하나인 평사낙안 (平沙落雁)과 같다 하여 평사라 하였는데,
    • 숙종 28년(1702년)에 하동권에 편입되고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화개면의 둔촌과 악양면의 신암, 삽암, 평사 역촌을 병합하여 평사리라 해서 악양면에 편입되었다
    • 현재는 상평(上平),외둔(外屯)을 합하여 평사리로 구성되어 있다.
  • 마을의 특징 및 자랑
    •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로 2005년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토지 촬영지로서, 최참판댁과 토지 세 트장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 오고 있으며, 매년 10월에는 토지문학제가 이곳에서 개최된다.
    • 사적 151호인 고소성은 신선대 밑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성의 축성연대는 AD622년 정도에 신라가 쌓았 으며, 성벽 둘레는 약 800m, 높이 3.5~4m정도이다 또한 고소성을 가로질러 형제봉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등산객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 평사리 305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동정호는 약15ha 면적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얼마되지 않으며, 악양 소상팔경 중의 하나인 동정추월(洞庭秋月)의 무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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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2-10-31 13: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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