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리

방화리

  • 가구수(인구수) :133가구(258명)
  • 자연마을 : 방화마을, 금촌마을, 가평마을
  • 마을의 특징 :
    방화마을은 현 동청(洞廳) 앞들에 형성되어 있었으나 대(大) 화재로 소실되어 上, 下마을로 분산되었다. 마을이름의 유래는 한 설(說)로서는 뒷산의 생김새가 디딜방아와 같다 하여 방화라 하였고 또 한 설로는 뒷산인 구곡산 주변이 꽃잎과 같아서 부쳐진 이름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의 동네는 삼림지대(森林地帶)였는데 조선조 22대왕인 영조때 전의 이문필이 개척하여 발전되었으며 그 뒤 약 30년 후에 김녕김씨와 광산김씨, 용궁김씨, 합천이씨가 정착하여 살고 있다. 금촌마을은 법정리동인 방화리의 한 행정마을로 방화마을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뒷산이 거문고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붙여졌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가평마을은 법정리동인 방화리의 한 행정마을로 방화마을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뒷산의 산세가 금성체(金星 体)를 이룬 꽃잎 같은 형상인 화예지(花 蕊地)로 아름다운 땅이라는 뜻으로 붙여져 전해지고 있으며 샛터에 솟대를 세워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논으로 변하여 대지로서의 지번만 남아 있다.

사평리

사평리

  • 가구수(인구수) :153가구(306명)
  • 자연마을 : 사평마을, 모성마을
  • 마을의 특징 : 사평마을은 사둑골로 높은 터, 신흥바닥, 배안골의 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위의 지질이 모래땅으로 이루어져 붙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을 역사적으로 추적해가면 사평의 남 서쪽산(우복 쪽)에 성지(城址)가 있어 형태로 보아 가야 때나 신라중기의 성(城)으로 추측되며 사평리 일대에 신라장(新羅葬)으로 추정되는 것 등을 미루어 볼 때 신라 또는 가야 때부터 자연부락이 형성되었다고 추정한다. 성씨로는 용궁김씨와 진양강씨가 主 성(姓)으로 형성되어 있다. 모성마을은 법정리동인 사평리의 한 해정마을로 전에는 모동(牟洞)이라 하였으나 1983년 마을 이름을 동(洞)자를 사용 않기로 하므로 “성(城)”자로 바꾸어 모성(牟城)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마을 뒷 산의 형상이 보리가 영그러 가는 형상이라 하여 모동이라 하다가 뒤에 모성이라 하였고 현재의 동리 뒤쪽 약 400m 위치에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안동(安東) 권(權)씨가 부자로 살았는데 권세가 얼마나 당당하였는지 길손(道客)들이 그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짐승같이 기어가기도 하였으며 그렇지 않으려면 되돌아 가야하는 행패를 부리므로 이를 안 도사(道士)가 그 집을 찾아가 주인을 보고 마을 앞 물길(水路)을 청용(靑龍=좌측)에 서 백호(白虎=우측)로 돌리면 더 부자가 되겠다고 꼬드겼더니 가산이 차츰 기울어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도 권부자가 살았던 것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으며 마을 앞 수로도 청용(좌측)에서 백호(우측) 쪽으로 흐르고 있다.

직전리

직전리

  • 가구수(인구수) :236가구(474명)
  • 자연마을 : 직전마을, 이명마을, 계산마을
  • 마을의 특징 :
    직전마을은 옛날부터 북촌에 속한 한 마을로 윗 동리의 앞산에 있는 도요지(陶窯地)의 유적이나 유물로 보아 고려때 이후부터 인가(人家)가 형성되었다고 보나 그 근거는 찾을 길이 없고 직전(稷田)이라 동명이 붙여지기 이전에 밀양(密陽) 박씨가 마을앞 들에 집성(集成)촌하고 살았다는 근거가 있다(현재는 경지정리로 인하여 없어졌음). 조선왕조 제12대 왕인 인조(仁祖)때(1625) 현 너뱅이들 옆에 널븐바위(네본바위 : 현재 유실됨)에 한 도사(道士)가 동자(童子)를 데리고 쉬면서 현재 마을 동쪽편의 원터(元基)를 가르키며 “동자야 너도 보았느냐?” 하고 물었다고 하는데 도사가 「그곳은 “피”가 잘 자라」 즉 곡식이 잘 되어 흉년이 들지 않고 배고픔을 모를 곳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피밭” 즉 직전(稷田)이 라 하였으며 지금의 동리는 숙종(肅宗) 5년(1679) 지금으로부터 330여 년전에 문헌상(文憲尙)이 처음으로 이사하여 정착하였고 현재는 강성문씨와 청주한씨가 집성촌하여 살고 있다.
    이명마을은 남으로 이명산(理明山 : 東京山, 理盲山)과 서쪽으로 계명산(鷄鳴山) 동으로 마안산(馬鞍山) 등의 고산 계곡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에 위치한 마을로 뒷산인 계명산의 이름을 따서 계산마을과 이명마을로 땀을 이루고 있었는데 1968년 경전선(慶全線)이 동리를 가로 지름으로 인하여 계산마을은 면소재지 쪽을 이르게 되고 위쪽은 뒷산인 이명산의 이름을 딴 이명마을로 되었다.
    계산마을은 직전리의 법정마을중의 한 마을로 계산이라 부르게 된 유래는 동네의 뒷산 이름이 계명산(鷄鳴山)이므로 달구산 또는 계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1968년 경전선(慶全線) 철도가 마을 중앙을 통과됨으로 인하여 두 마을로 분리되어 면 소재지 쪽을 계산이라 하고 위쪽을 이명(理明)이라 부르게 되었다.

옥정리

옥정리

  • 가구수(인구수) :202가구(320명)
  • 자연마을 : 신촌마을, 빙옥마을, 남포마을
  • 마을의 특징:
    신촌마을은 옥정리에 속해 있으나 고려말엽에 가리동은 곤양군 초량면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 국도에 삼거리가 있는데 하동군과 진주와 곤양군의 삼군(三郡)을 통하는 세 살래 길이 있어 삼거리라 칭하였고 지금의 당산보(북천역) 옆을 말하는 것을 보면 신촌은 3개 군의 경계지역으로 가리동은 곤양군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동리는 새로이 형성되었으므로 부락명(部落名) 그대로 새로 생긴 마을 즉 신촌(新村)이다.
    빙옥마을은 고려말엽에는 진주의 대야천면(大也川面)의 선천(鐥川)에 속했으며 빙옥(氷玉)이라 했으며 약 400년 전에 인가(人家)가 형성되어 살았으며 어씨(魚氏)가 집성촌(集成村)하고 살았다 하나 그 근거는 어득강정(魚得江亭)터가 있는 것 이외에는 근거를 찾을 길 없고 1914년에 대야천면의 일부(빙옥, 남포, 화정 등)가 하동군으로 이속(移屬)할 때 하동군 북천면으로 이속되었다.
    남포마을은 북천명의 동북쪽에 위치하는 마을로 연대는 미상이나(고려중엽으로 추정) 부락명을 난곡(蘭谷)이라 불리워졌는데 고려 공민왕 7년(1358년) 남해현(南海懸)이 왜침(倭侵)을 당하자 주민들이 일부는 현 삼천포(三千浦)로 일부는 진교의 대치사로 분산 피난을 하였는데 당시 진주 목사의 명에 의하여 대야천변(大也川邊)으로 옮겨 살게 하였던바 난곡에다 현청(懸聽)을 두고 약 70년간(공민왕 7년(1358년) ~ 세종 9년(1428년))까지 있으면서 난곡을 개명하여 남포(南浦)라 불리워졌다. 뒤에 세종 원년(1419년)에 대야천변의 남해현과 곤명현(昆明縣)을 명하여 곤남현(昆南懸)으로 하였다가 순종 8년(1914년)에 지방행정구역개편으로 대야천면(大也川面)이 하동군으로 편입되므로 남포부락도 하동군으로 합병되었다.

서황리

서황리

  • 가구수(인구수) :145가구(302명)
  • 자연마을 : 서황마을, 중촌마을, 기봉마을
  • 마을의 특징 :
    서황마을은 고려말엽에 남포와 빙옥, 화정과 더불어 진주의 대야천면(大也川面)이었으나 조선조에 남포, 화정과 더불어 일시 남해현에 속해 있다가 조선조 말엽인 1914년에 하동으로 이속(移屬)되어 기존의 북면과 합병하여 북천면이 되었다. 마을명의 유래는 죽당선생의 서원인 인천서원(仁川書院)이 있은 곳으로 서원골로 불리다가 뒤에 황기들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서황이라 불리게 되었다. 중촌마을은 대야천면이 진주에 속해 있을 때 통칭 인천(仁川)으로 불리울 때 상촌(현재 상촌)과 하촌(남포, 서황)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하여 중촌으로 불리워졌으며 현 중촌의 회관 앞에 큰 느티나무(일제 강점때 벌목되었음) 아래에서 상, 중, 하촌의 중대사를 의논하고 회의도 개최하였다고 전해진다. 기봉마을은 3개 자연마을(터골, 장터골, 마항골)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방 후 중촌에서 분동되었다가 다시 중촌에 합병되었다가 1972년 다시 분동되어 기동으로 부르다 1983년 농촌지명 변경 작업으로 기봉(基 丰)으로 개칭되어 부르게 되었다.

화정리

화정리

  • 가구수(인구수) :187가구(364명)
  • 자연마을 : 화정마을, 상촌마을
  • 마을의 특징 :
    화정마을은 원래 진주목(晋州牧)에 속하는 대야천면의 한 부락이었는데 1910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북천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1914년에 양천리(현 상촌)를 병합하여 화정리로 법정리동이 되었으며 마을 명칭은 주변의 지형지국(地形地局)이 꽃봉과 같이 생겨 “花” “字” 와 군데군데 수령(樹令)을 알 수 없는 정자목(亭子木)이 장관을 이루어 “亭” “字”를 취하여 화정(花亭)이라 칭하였다는 설이 구전되고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공민왕때(1307년, 정유년) 남해현이 왜구에 쫓겨 이곳 대야천면 야거(野?)에 우거했다고 하는 곳이 이 마을에 있는 독골이란 설도 구전되고 있으며 경술국치후 을묘년(1915년)에 우국지사의 한을 달래기 위해 모였던 십일대(十逸臺)와 인곡에 계남 최숙민(溪南 崔琡民)이 자옥산정(紫玉山亭)을 지어 후학(後學)의 학문을 강마하던 장수시소(藏修之所)가 있으며 사간원의 정언(正言)을 지낸 이택환(李宅煥)의 화주대(華 冑台)가 있었다 상촌마을은 북천면 화정리의 한 행정부락으로 원래 진주목의 대야천면에 속하는 양천리(陽川里 : 古名 그 이전은 古也村)로 1910(경술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화정리에 합병되었고 일제강점시 上 ㆍ中 ㆍ下촌으로 개명되지 않았나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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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2-10-31 08: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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