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이유가 맞습니다. 바로 성적이 떨어져서입니다. 전교 1등 하는 아이인데 전교 10등 성적표를 받아 드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어떤 얼굴이 떠 올랐다고 합니다. 당연히 '엄마' 얼굴입니다. 도저히 그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한강으로 향했다고 하는데 다행히도 빨리 경찰에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무얼 느끼나요? 전교 100등 하는 아이가 200등 했다고 뛰어내렸다는 그런 기사나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까? 뭔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죠? 200등 한 아이가 뛰어내려야 약간이라도 이해가 될 것 같은데... (물론 둘 다 절대로 뛰어 내려서는 안됩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죠?
뛰어 내린 그 아이는 자신이 왜 소중하고, 왜 귀하고, 왜 가치가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가, 우리 사회가 그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오직 전교 1등이기에 자신이 소중하고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믿기에 그게 사라지는 순간 한강으로 향한 것일 겁니다. 100등 하는 아이는 결코 거기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걸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한강으로 갈 일도 없습니다.
이게 어디 우리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이겠습니까? 우리들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 남자들은 (꼭 남자만은 아니겠지만) 명함이 없어지면 인생이 사라지는 줄 압니다. 잘 나가던 대기업의 임원조차도 자리가 사라지는 순간 자신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줄 압니다. 남편으로서의 역할도,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고 쉽게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성취지향적인 사회입니다. 성과만이 곧 선(善)입니다. 물론 잘 하는 것이 뭐 나쁜 일이겠습니까? 돈 잘 벌고, 빨리 승진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실적을 내고, 뭐 이게 나쁜 것 아니죠. 당연히 좋은 실적을 내도록 노력해야 하고 1등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자신의 가치라고 믿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외적인 성취 이외에 자신이 진정 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모른다면 어떤 조건이 갖추어진다고 해도 결코 기분이 좋아질 수 없습니다.
나는 49가지 단점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40대 중반의 남자가 대기업의 이사로 남들보다 빠른 승진, 학벌, 집안, 외모 어느 것 하나 남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승진을 하고 문제가 생겼습니다. 매주 사장단 앞에서 발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열심히 준비했고 밤을 세워가며 자료를 만들고 수치 하나까지 전부 외웠습니다. 그런데 너무 잘하려는 욕심 때문이었을까? 발표를 시작하기도 전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발표를 하는 중 긴장이 최고조로 올라가서 더듬거리자 누군가 질문을 했습니다. 분명 밤새 외웠는데 머리가 텅 빈 느낌, 앞이 깜깜해지고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간신히 발표를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 순간 온갖 비난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느낌, 다음 주부터 온갖 핑계를 대고 발표를 피해 다녔습니다. 점차 자신감이 떨어지고 우울, 불안으로 잠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숙제를 냈습니다. '당신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써 오세요, 아주 사소한 것도 좋습니다.' 일주일 내내 생각했지만 자신의 장점은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단점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49가지를 적은 것입니다. 장점은 없고 단점만 49가지를 가진 사람, 그가 기분이 좋을 리도, 자신감이 있을 리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숙제를 내어 놓으며 씩 웃었습니다. '선생님, 제 문제가 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단점이라고 적어온 것 중에 많은 것이 자신의 장점이었습니다. '저는 매사에 우유부단합니다.' 간단히 바꾸어 주었습니다. '참 신중한 분이시군요.' 물론 단점까지 전부 장점이라고 우기자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뜻입니다. 기분이 좋아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우선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건강하게 바꾸는 것입니다.
칼럼니스트 : 신영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